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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간 이상 자위하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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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Claudia 작성일24-05-27 15:37 조회1,3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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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위용품 무지의 광풍 속에서 살아남기​“공부하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나는 공부를 젊은 날 이뤄내야 할 성취이자 성공의 척도로 삼는 격언에 반대한다. ‘앎’을 탐구하는 과정은 필히 고통과 상처를 수반한다.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몸들의 역사를 마주하고 소수자의 언어로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혼란과 괴로움의 연속이다. ‘상식’이 모래성처럼 부서질 때의 충격, 나의 천진이 폭력임을 깨달았을 때의 부끄러움, 연대와 존엄을 가르쳐 주지 않은 교육에 대한 분노가 쌓여간다. ‘정상 사회’와 불화하며 우는 날이 많아진다. 그래서 공부는 아름다울 순 있을지언정 기쁠 순 없고, 불행한 삶을 끌어안을 순 있을지언정 행복하진 않다. 잠깐 웃고 오래 슬퍼하며 차갑게 분노하는 일. 이것이 공부다.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생태주의, 장애학을 만난 것은 쓸쓸한 축복이었다. 중산층 계층에 편입되려고 발악했던 나는, 어느덧 내 집 마련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버린 사회 구조를 질문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정치적 중립’ 뒤에 숨어 비겁함을 합리화했던 과거와 달리,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서구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의 언어를 남발하며 ‘지당하신 말씀’만 반복했던 날들과 결별하고, ‘인종, 젠더, 계급’을 가로지르며 불온하고 독창적인 언어를 발명했다. 낯선 언어는 획일화된 세계에 도전하는 혁명이자, 나를 구원하는 복음이었다. 공부를 통해 위치성과 당파성을 자각하면서 진화를 거듭한 몸은 주어진 현실과 창조된 현실 사이에서 자주 충돌했다. 부딪히고 다치고 깨질 때마다 다시 태어났고, 앎의 뿌리가 튼튼해질수록 더 많은 몸들과 연결되었다. 그 순간, 고통받는 타인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었다. 내가 그였고 그가 나였다.​내가 진화를 거듭하는 사이에 세상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아니, 회복 불능 판정을 내려야 할 만큼 망가졌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류는 병들어간다. 자본주의는 무한대로 몸집을 불리며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집어삼키려 한다. 실체 없는 혐오 발언이 바이러스처럼 번져나가는데, 이를 범죄로 인식하는커녕 ‘갈등’, ‘대립’ 프레임을 씌워 무마시킨다. 인셀들의 무지성 반격을 보고 백래시의 광풍이 불어닥친다며 설왕설래한다. 남녀 간의 의식 불균형과 인식 불균형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사회 갈등의 탈을 쓴 성차별 문제(연애, 결혼, 출산, 취업 등)는 개선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정치인들의 행보는 더욱 가관이다. 화합의 정치를 추구해도 모자랄 마당에, 좌/우 가리지 않고 ‘혐오’를 알력 다툼에 이용한다. 갈라 치기를 일삼으며 혐오를 조장하고, 혐오 세력에 직접 마이크를 쥐여주며 표를 구걸한다. ​혁명이 실패를 담보로 한 투쟁이라지만, 이리 속수무책으로 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끝장 볼 기세로 달려들었던 자매들은 페미니즘 운동의 동력이 꺾여버리면서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무지, 무능, 무의식, 무신경, 네 박자를 고루 갖춘 남성 사회는 연일 ‘역차별’을 부르짖으며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호소하고 있다. 백래시로 위장한 무지가 무논리를 정당화하는 요즘, 나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분명 내 주변은 멀쩡한데, 조금만 테두리 밖을 벗어나면 안 썩은 곳이 없었다. 주저앉아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다. 희망이 사기라면 절망은 사치다. 망한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기 위해 페미니즘 독서모임을 결성했다. 코드명 ‘블랙 웨이브’, 직역하면 ‘검은 물결’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우리들이 일으킨 작은 물결이 거센 파도가 되어 누군가에게 가닿기 바라는 마음을 담아지었다.​3월, 첫 번째 물결을 일으킬 책으로 ;을 골랐다. 이 책은 한국 사회 섹슈얼리티 쟁점들을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저자는 2세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여성적 섹슈얼리티는 젠더 관계의 산물”이라는 이론을 인식론적으로 계승하되, 젠더 환원에는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반면에 방법론 측면에서는 이분법에 반대하는 ‘탈식민주의’와 인종, 계급, 젠더, 장애 여부, 섹슈얼리티, 민족 등 다양한 차이와 억압이 얽혀 구조가 작동한다는 ‘교차성 페미니즘’, 본질주의와 보편적 진리, 근대성을 비판하며 가부장제 질서에 도전하는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넘나들며 사유의 폭을 확장시킨다.​저자의 위치성에서 재구성된 논쟁의 쟁점들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유주의-가부장제가 대결하면서 일종의 자원이 되어버린 ‘여성성’과 ‘남성성’. 둘째,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 중심주의’가 갖는 모순. 셋째, 성 평등을 둘러싼 차이의 정치학. 넷째, 여성 몸의 공간화와 비장애 성인 여성을 기준으로 한 ‘성적 자기결정권’의 한계로 축약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세부적인 사항을 살펴보면 미투 운동, 낙태죄 폐지 운동, 외모주의, 난민 혐오, 성소수자 혐오, 군대 및 군 ‘위안부’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발 늦게 당도한 목소리 같지만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들이 지금, 여기, 우리들에게 울려 퍼졌다. ​이 글은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쓴 것이 아니다. L 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사회 현안들에 통달했다면, 독서모임에 참여할 게 아니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을 것이다. 정확한 방향과 정답을 알고 있는데 똑같은 자위용품 공부를 반복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함께 배우고, 각자의 위치에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모였다. 이 글을 포함하여 앞으로 작성될 후기는 ‘나’를 중심으로 쓰인 글이되, 토론하며 경합한 내용이 섞여 있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생각과 고민을 포괄하는 글이기도 하다. 부디 만남을 거듭할수록 개인적인 성찰을 넘어 더 나은 실천법을 실현할 수 있길 바라며, 책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 섹슈얼리티 정치학 (1) : 리얼돌 산업​섹슈얼리티는 자연의 법칙이 아닌 이데올로기다. 성, 사랑, 연애, 결혼 안에는 일명 ‘공식적 규범’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문화적 각본이 작동한다. 섹슈얼리티 규범하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은 절대적 규칙으로 통용된다. 여성은 얌전하고 단정하고 순종적이어야 하며, 남성은 활발하고 용감하고 진취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성’을 욕망해야 한다. 만약 해당 전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이들이 있다면, 사회는 가차 없이 ‘비정상’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식욕 · 수면욕· 성욕이 인간의 3대 욕구라는 주장 역시 섹슈얼리티를 강화하기 위한 낭설일 뿐, 정설이 아니다. ‘성교(삽입 섹스)’ 중심 ‘성활동’은 남성의 성욕을 타고난 본능 정도로 축소시키며, “자고로 남자란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그 짓(섹스)을 한다”라는 말에 권위를 부여한다. 정말 남성의 성욕은 식욕과 같아서 주기적으로 배출해야 하는 것일까.​숱한 논란에도 상용화된 리얼 돌(real doll)은 제작 단계부터 이성애자 남성의 섹스 대용품으로 만들어졌다. 성인 여성 키에 골격과 관절이 있고, 실리콘으로 피부를 덧대어 마치 살아 있는 사람 같은 느낌을 준다. 최근 한국에서 리얼 돌 판매 여부를 두고 “자위 용품도 판매하는데 리얼 돌이 뭐 어때서 그러느냐. 취향일 뿐이다”, “합법적인 강간이다”, “폭력적인 게임을 한다고 모두 살인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형은 인형이지 사람이 아니다” 등등 한바탕 뜨거운 설전이 일어났다. 찬반 대결은 논점을 흐리는 트릭이다. 리얼 돌 산업이 ‘성적 취향 vs 성적 대상화’로 논쟁 구도가 굳어지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관계’ 문제는 제외되었다. 양쪽 모두 ‘남근 중심주의’라는 틀에 갇혀 동어 반복만 일삼고 있는 것이다. ​‘일부’ 남성들의 리얼돌 예찬은 소름 돋을 만큼 격렬해서 도저히 눈 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국산 야동(불법 성관계 촬영물)도 못 보고, 성매매도 못하고, 여자들이 눈이 높아져서 나 같은 남자는 만나주지도 않는다. 제발 리얼 돌이라도 구매할 수 있게 해달라” 요구하고 있으며, 리얼 돌 도입이 최소한의 ‘남성 인권’을 지키는 길이라는 주장도 심심찮게 엿보인다. 남성들의 한탄(?)을 들어주기에 앞서 왜 여성용 리얼 돌은 남성용 리얼 돌만큼 대중화되지 않았는지 되짚어봐야 한다. 혹자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성욕이 적어서’라고 말하겠지만, 이는 추측에 불과하다. 대개 여성들은 성인 남성 사이즈의 인형이 집에 있는 것을 불쾌해하고, 인형마저 씻기고 관리하는 돌봄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에 반해 남성들은 리얼 돌을 단순히 ‘여성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대체 왜 이런 인식의 차이가 발생했을까.​오천 년 가부장제 역사 속에서 여성은 ‘몸’이었다. 이 말인즉슨 리얼 돌이 성적 대상화를 촉발시킨 것이 아니라 여성이 현실에서도 ‘인형’처럼 대상화되었기에 리얼돌 산업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을 고려했을 때 ‘성매매-성폭력-리얼 돌 산업’은 연속 선상에 있다. 결코 과장된 주장이 아니다. 예로부터 여성은 재산이나 물건이었다. 명리학에서 남자 사주에 ‘財(재물 재)’가 많으면 돈과 ‘여자’가 많다는 해석이 중론이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자에게는 여성이 ‘전리품(戰利品)’으로 하사되었고, 약소국이 강대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의미로 ‘공녀(貢女)’를 차출하여 상납했다. 산업 혁명이 일어나면서 여성의 지위가 급변한 이후에도 여성에 대한 인식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내 또래 8090세대 여성들은 ‘큰 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천운으로 ‘젠더 사이드(여아 낙태)’ 피해 생존자가 되었더니, 국가는 이제 와서 “왜 너희들은 애를 낳지 않느냐”라고 간섭한다. 결혼시장에서 밀려난 남성들은 “나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여자가 없냐”라고 억울함을 토로한다. 남성에게 여성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가 아니라 최선을 다한 내가 가져야 할 ‘트로피’인 것이다. 남성들과 다르게 여성들은 “나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남자가 없냐”라고 따지지 않는다. 남성은 인격체를 지닌 인간이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매매는 돈 주고 ‘몸’을 샀다는 이유로 가해할 권리를 승인받는 것이고, 성폭력은 범행 대상을 이성이나 정신이 없는 ‘몸’으로 간주하는 폭력이다. 리얼 돌도 마찬가지이다. 인형은 인형일 뿐 위험한 게 아니라는 주장은 궤변이다. 미국의 사례만 봐도 흑인 인형은 백인 인형의 절반 가격에 팔리고 있다. 만일 ‘백인 이성애자 비장애 남성’의 섹슈얼리티를 벗어나 개개의 성 지향성과 취향에 맞춘 ‘장애 자위용품 여성/남성 리얼 돌’, 페도필리아 전용 ‘어린이 리얼 돌’, ‘제3세계 여성을 형상화 한 리얼 돌’이 시장에서 판매된다고 상상해 보자. 이것이 과연 소비와 취향의 문제인가, 아니면 인권 문제인가. ​리얼 돌 산업을 공론화시키려거든 ‘성교(삽입 섹스)’ 중심의 성 활동을 해체하고 ‘성욕’의 의미를 다시 써야 한다. 성욕은 생존의 필수 요소가 아니라 문화적 구성물이다. ‘성’관계가 아닌 성‘관계’는 친밀감, 성적 유대감이 더욱 중요하다. 특히 친밀감을 기반으로 한 신뢰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관계 맺기는 고도의 인내심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탐색하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파악하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협의하고, 당신을 위해 감정 노동과 돌봄 노동을 자처하며 긴장을 감수할 때라야 단단한 관계가 구축된다. 하물며 ‘원나잇 스탠드’에 응할 때에도 합의, 의사 표현, 상호 존중은 필수다. 리얼 돌 산업은 관계를 삭제한 채 남성의 성욕을 ‘배설욕’으로 격하시키고, 성욕을 재정립할 기회마저 박탈한다. 나는 리얼 돌 자체가 위험하다기 보다 관계 맺기가 사라진 세계가 두렵다. 리얼 돌 산업은 성과 사랑의 의미를 되묻는다. 나와 타인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다정한 세계는 영영 오지 않는다. ​​• 섹슈얼리티 정치학 (2) : 외모주의와 공중보건 문제​2016~2017년 사이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을 주축으로 ‘외모주의’에 반대하는 ‘탈코르셋 운동’이 전개되었다. ‘여성성’을 집어던진 여성들은 사탕껍질 같은 옷을 벗어던지고, 구두약 성분이 함유된 립스틱을 짓이기고, 긴 머리를 싹둑 자르며 외쳤다. “왕자는 필요 없어. 왕좌를 내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탈주극이 시작되었다. 어느 저녁, 나는 K 언니와 부산 인문학 독서모임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면역 지하상가를 지나고 있었다.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언니가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손가락으로 화장품 가게 앞 전광판을 가리켰다. “저 봐라. 저 뭐꼬?” 고개를 들어 광고를 보자마자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대형 전광판에는 모델 출신 남자 배우가 ‘남성용 비비크림’을 선전하고 있었다. 나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혼잣말을 읊조렸다. “자본주의가 남자들 주머니까지 털어가려고 안달이 났구나” 머리가 복잡했다. 외모주의가 ‘가부장제-신자유주의-여성주의’와 얽혀 새로운 지형을 그리고 있다는 확신이 섰다. ​가부장이 전권을 휘두르는 체제(가부장제)와 승자 독식, 독자 생존 구조(신자유주의)의 충돌은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몸’으로 인식되고 열등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외모, 지식, 재능, 성 등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팔 수 없는 것은 없다. 쓰레기도 값어치 있는 것으로 둔갑시킬 줄 안다면 누구든 장사꾼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먹방’이 유행하면서 많이 먹는 것도 재능의 반열에 올랐다. 많이 먹든 노출을 하든 돈만 많으면 장땡이고, 외모는 돈을 벌어들이는 획기적인 수단이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며 가부장제의 위력이 잠시 주춤해진 것이다. 그러나 외모주의는 계급적, 성별적 현상이 교차하며 보다 다층적인 문제가 중첩되어 있다.​최근 몇 년 사이 외모주의는 남녀노소 모두가 실천해야 하는 자기 관리로 대두되었다. 인스타그램 릴스를 넘기다 보면 성형으로 환골탈태한 남성의 비포 애프터 영상이 뜬다. 여성들이 화장품을 버릴 때 다른 한편에서는 ‘화장하는 남자 청소년’들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요즘 남성들 사이에서는 ‘키 크는 수술’이 유형처럼 번지고 있다. 이제는 남성들도 외모 평가를 피할 수 없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100억 부자 유병재 vs 무일푼 차은우’는 밸런스 게임이 아니라 어불성설이다. 외모가 곧 능력이요, 재능이요, 성격이요, 강력한 자본이다. 여성에게 누구와 살 것인지 물어도, 남성에게 둘 중 누구로 태어날 것인지 물어도 백이면 백, ‘무일푼 차은우’를 선택할 것이다. 이처럼 외모주의의 지형 변화는 ‘외모 제일주의’를 절대적 규범으로 고착화시켰다. 간첩이든, 도둑이든 잘생기고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외모주의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몸을 억압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성형 수술은 단지 ‘아름다움을 돈 주고 살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일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다. 충분한 자본과 실력 있는 의사를 만나야 성공할 수 있는 성형 수술은 학대인가, 계급 상승의 기회인가, 빈부격차인가.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추려고 내 몸을 개조하는 것은 자유 의지인가, 외부의 압력 탓인가. 가장 심각한 폐해는 단연 ‘의료 인력난’이다. 사람 살리는 의사는 나날이 줄어들고 돈 되는 성형외과, 피부과에 전문의가 편중되고 있다. 산부인과, 소아청소년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흉부외과는 ‘연봉 5억을 준대도 지원하지 않는다’라며 곡소리를 낸다. 정형외과 의사들마저 미용 성형에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정부는 어떻게 개입해야 할까? 절로 한숨이 나온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반쪽짜리 해답으로 ‘차별금지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자위용품 의견을 모았다. 보통 ‘차별’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남성이 여성을, 이성애자가 동성애자를, 백인이 흑인을, 한국인이 이주민 노동자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모습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물리적인 폭력과 고정된 이미지가 차별 스펙트럼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차별은 강자와 약자라는 이자 구도를 넘어 한 사람의 인격과 개성을 말살하는 모든 말과 행위를 포함한다. 모든 이들이 외모, 종교, 지역, 인종, 학벌, 성별 등 정체성의 일부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법적으로 구성한 것이 바로 차별금지법이다. 키가 작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취업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다면,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이 인권 침해라는 인식이 자리 잡는다면, 얼굴을 칼로 찢고 꿰매는 미용 목적 성형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이와 더불어 ‘노동하는 몸’, ‘공부하는 몸’, ‘꾸미는 몸’은 모두 다른 몸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3교대로 일하며 수시로 낮밤이 바뀌는 블루칼라 노동자는 영양을 제대로 챙길 수 없어 살이 찌기 쉽고, 나처럼 공부하는 몸은 손톱을 기를 수 없다. 손톱이 조금만 길어도 타자를 치거나 연필을 잡을 때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상위 0.01%에 속하지 않는 이상, ‘꾸미는 몸’은 관리할 수 있는 돈과 ‘저녁 있는 삶’을 누리는 자들의 특권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한 사람의 몸에는 계급이 새겨져있다. 그 누가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이들을 향해 ‘자기 관리를 못 했다’, ‘게으르다’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외모주의를 타파하고자 한다면 나부터 상대방을 존재로 인식하는 눈을 키워야 한다. 내 위치성을 기준 삼아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탈코르셋(외모주의 반대) 운동의 시발점일 테니 말이다.​​• 젠더들​“생물학적 여성들과 연대하겠다”, “생물학적 여성이 진짜 여성이다” 나는 이 말을 수십, 수백 번 들었음에도 매번 처음 듣는 것처럼 당혹스럽다. 정체성은 균질적이거나 본질적이지 않다. 생물학‘적’ 여성은 가부장제의 성별 이분법에 따라 임의로 구분 지은 경계일 뿐, 실재가 아니다. 내가 생물학적으로 완벽한 여성이라면 xx 염색체 수와 호르몬 수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거나, ‘에스트로겐’ 수치와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정확히 반반이어야 한다. 단언컨대 그런 사람은 없다. 여성은 중년에 접어들면서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아지고, 남성이 중년이 되면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아진다. 앞서 언급한 생물학‘적’ 근거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여성으로 태어나 남성이 되고, 남성으로 태어나 여성이 되어가는 것인가. ​그보다 동일한 여성이 가능한지 묻고 싶다. 나는 남성과의 관계에서는 여성이고, 장애인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비장애인이고, 트랜스젠더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시스 젠더 여성이고, 이성애자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양성애자이고, 백인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아시아인이며, 엘리트 여성과의 관계에서는 ‘고졸’ 여성이다. 누구와 교류하는지에 따라 관계적 토양이 달라지며 젠더, 장애 유무, 인종, 지역, 계급이 교차한다. 나는 때때로 너무 여성적이어서 문제가 되고, 다른 때에는 너무 여성적이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양성이 있다고 가정하는 사회에서는 ‘생물학적 본질주의’가 ‘생물학’을 대변한다. 이에 저자는 “생물학은 환경과 문화와 생명체의 상호 작용 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본질을 캐는 학문이 아니다. 아니, 생물학뿐만이 아니다. 본질을 추구한다면 이미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다”(p186)라고 일갈한다.​동의한다. 페미니즘은 ‘누가 여성인가?’,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질문하는 학문이다. 태초에 모든 이들은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가부장제의 남/녀 이분법에 따라 ‘남성’과 ‘여성’으로 만들어진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차이가 차별을 낳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한다는 믿음은 성기 집착 즉, ‘정상성’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이때 생물학‘적’ 여성이 ‘여성성’을 수행하지 않고 생물학‘적’ 남성이 ‘남성성’을 수행하지 않으면 성범죄의 타깃이 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0년 개봉작 ;의 모티프가 된 ‘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 살인사건이다.​브랜든 티나/티나 브랜든(이하 브랜든 티나)는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성장 과정에서 남자로 사는 것이 편하고 좋은 삶의 형태라고 여기게 된다. 머리를 숏컷으로 자르고, 헐렁한 셔츠를 입고, 붕대로 양말을 동그랗게 말아서 팬티 속에 넣고, 가슴을 천으로 겹겹이 압박하여 남성의 외형을 갖춘다. 티나 브랜든은 ‘브랜든 티나’로 이름을 바꾼 뒤 폴스 시티로 향한다. 둥지를 튼 곳에서 비혼모 캔디스와 그녀의 친구들인 톰과 존, 라나와 어울린다. 브랜든 티나는 ‘라나’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둘은 즐거운 한때를 만끽하지만 또래 청년들은 섹슈얼리티 규범을 어기고 남자로 살아가는 브랜든 티나를 예의주시한다. ​동네 남자들은 은밀하고 잔인하게 ‘그/녀’를 괴롭힌다. 청년들은 브랜든 티나가 여성임을 확인할 기회를 노린다. 그들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폭력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남자들은 브랜든 티나를 도시 외곽으로 끌고 가 발가 벗기고 린치를 가하며 낄낄댄다. “것 봐, 여자잖아” 뒤이어 여성을 여성으로 낙인찍는 가장 확실한 폭력으로 쐐기를 박는다. 자위용품 청년들은 브랜든 티나를 여자로 만들어주겠다며 집단 성폭력을 저지르고 살해한다. 해당 사례는 ‘양성’ 구분이 철저히 남성 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시사함과 동시에, 성별에 따른 문화적 규범이 소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남/녀 성별 체제를 자연 현상으로 전제하는 사회에서 제2, 제3의 브랜든 티나 사건은 수없이 반복된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 MTF 트랜스젠더 여성들의 학창 시절 일화는 ‘성기 중심 사고방식’이 얼마나 끔찍한 폭력을 야기하는지 보여준다. 남성으로 태어났지만 여성으로 정체화한 MTF 트랜스젠더들의 상당수가 생물학‘적’ 성에 부과된 ‘남성성’을 수행하지 않아서 학교폭력을 당했다. 동급생들은 유독 조용하고 얌전한 그들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하루가 멀다 하고 “너 생리는 안 하냐?”, “호모냐?”라는 성적 비하 발언을 했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해 봐야겠다며 화장실로 끌고 가 바지를 벗기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성기 집착 사회는 소수자에 대한 폭력을 부정하기도 한다. 1996년 남성 3명이 길거리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을 승용차에 납치하여 집단 강간한 사건이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도 있었지만, 대법원은 “피해자가 여성이라고 할 수 없고 생식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법 정의가 인권 차원의 사안이 아니라 “남성의 눈에 비친 진정한 여성이 누구인가?”를 중심으로 피해자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앞에 예시로 든 ‘브랜든 티나’ 또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사건 발단 초기 브랜든 티나는 경찰 당국에 강간 피해를 신고했지만, 보안관은 눈앞에 있는 가해자들을 체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브랜든 티나에게 “여자인데 왜 남자처럼 하고 다니냐?”라고 추궁하며 피해 사실을 의심했다. 양성 개념을 교란하는 것이 ‘강간’ 보다 더 큰 죄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진영 내부에서는 소위 ‘TERF(터프) : Trans-Exclusionay Radical Feminist’를 주축으로 MTF 트랜스젠더 여성이 여성성을 강화한다며 혐오 발언들을 쏟아낸다. 시스 젠더 여성에게 코르셋의 의미가 동일하지 않듯이, 트랜스젠더 여성에게도 코르셋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여성들은 ‘숏컷’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나는 ‘다이어트’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시스 젠더 여성이 다리를 벌리고 앉으면 조신하지 못하다는 질책을 듣지만, 트랜스젠더 여성이 다리를 벌리고 앉으면 ‘남자였던 시절의 버릇’이 나온 거 아니냐며 수군거린다. 사회적 요구와 구조를 깡그리 무시하고 주체의 선택만으로 모든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고로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성성’ 수행은 사회적 성원권을 얻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은 여성이 아니고 트랜스젠더 남성은 배신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고한다. 시스 젠더 여성과 트랜스젠더 여성은 대립하지 않는다. 시스 젠더 여성인 나 또한 규범적 여성성을 수행할 때가 있다. 아이브로우로 눈썹을 칠하고, 여름에는 원피스를 즐겨 입는다. 이런 나는 백래시 직격탄 맞은 아가리 페미니스트인가? 정녕 가부장제에 균열을 일으키고 싶다면, 시스 젠더 여성과 트랜스젠더 여성 사이의 교차성을 사유해야 한다. 생물학적 여성이 여성의 기준을 정하겠다는 발상은 ‘진짜 여성’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하다. 정말 완벽한 표본을 지닌 진정한 여성이 존재하는가. 여성도 남성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진짜와 가짜를 판별하겠다는 태도는 가부장제의 성별 이분법을 강화시킬 뿐이다. ​페미니즘이 칼을 겨눠야 할 적이 누구인가. 의학적 트랜지션을 거치기 위해 꽃을 좋아하지 않아도 좋아한다고 말하는 MTF 트랜스젠더 여성인가, 여성성/남성성에 부합하는 모습으로 트랜지션을 마쳐야 시민권을 부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가부장제인가. 단연코 개인이 아닌 구조에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 여성의 지위 상승 요구,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는 것으로는 균열은커녕 스크래치도 낼 수 없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제가 규정한 ‘정상성’ 자체에 도전해야 한다. 나와 당신은 여성이되 여성이 아닐 수 있고, 남성이되 남성이 아닐 수 있다. 성별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이므로 얼마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억압받고 낙인찍힌 몸들을 ‘우리’의 영역으로 불러들일 때, 비로소 한계는 가능성으로 변모할 것이다.​​• 미투와 피해자 중심주의 ​2018년 3월 1일, 김지아 기자가 JTBC 소셜 라이브에 출연해 ‘미투 운동’은 증거가 없다는 비판을 전면 반박하고 나섰다.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증거입니다” 홀로 숨죽여 울었을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한마디에 감정이 북받쳤다. 하지만 심적으로 공감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다.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질수록 ‘피해자는 언제나 옳고 선하다’라는 논조를 띄는 것을 보며 위험신호를 감지했다.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사회적 약자들도 ‘디지털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 온라인을 통한 고발은 (가해자와 한통속인) 사법 기관을 거치지 않고도 범죄 사실을 공론화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피해자들이 피해를 발화할 수 있다는 것은 반길 일이지만, 그 이면에는 부작용도 만만찮다. ​네티즌들은 가해자가 특정되자마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SNS 계정과 자위용품 뉴스 댓글란에 악플 테러를 가하고, 사돈에 팔촌까지 신상을 털어 사회적으로 매장한다. 그들은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지만 내 눈에는 개인신상정보 유출 범죄자일 뿐이다. 팩트 체크 없는 폭로는 ‘혁명’의 장을 난장판으로 만든다. 가해자로 지목된 자는 인터넷 상에 나도는 증거를 수집하여 고소 준비를 하고,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자에서 명예훼손 혹은 무고죄 피의자로 전환된다. 피해자의 복수를 대신해주는 것이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이라면, 어째서 피해자가 두 번 고통을 짊어져야 하는가. 더구나 ‘미투 운동’이든, ‘학폭 미투’든 모든 피해 고발 속에는 반동 분자들이 퍼뜨리는 거짓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이를 간과한 채 인민 재판으로 정의를 실현하려는 것은, 어렵사리 목소리 낸 피해자들을 곤경에 빠뜨릴 뿐더러 혹시 모를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하는 일이다.​피해자의 억울한 한을 풀어주고, 범죄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피해자의 목소리’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저자는 ‘피해자 중심주의’는 범죄에서 상식으로 적용되어야 할 조건일 뿐,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강도, 살인, 사기, 폭행 사건에는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범죄 피해가 신고되면 경찰이 피해자의 말을 토대로 수사에 착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은 신고부터 난항을 겪는다. 피해자가 아동이면 너무 어려서 의심받고, 노인이면 너무 늙어서 의심받는다. 너무 뚱뚱하거나 깡마른 체형이어도 피해 진술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여성 운동은 피해자의 경험이 부정당하는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상식과 배치된 주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피해자 중심주의’는 여권 상승으로 얻어낸 결과물이 아니라, 여성의 지위가 낮아서 파생된 언어다. ​그렇다보니 ‘피해자 중심주의’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다. ‘피해자의 눈물이 진실이고 증거’라는 말은 암암리에 ‘정조를 지닌 여성’만 피해자로 인식하는 ‘순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며 기존의 ‘피해자 정체성’을 공고히했다. 피해자를 보편적인 인권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이, 외려 피해자의 인권을 억압하는 형태로 오염된 것이다. 저자는 안타까운 상황을 진단하며 “피해는 상황이지 정체성이 아니다. 피해자 정체성은 더 위험하다. 피해자라는 위치가 곧 피해의 근거가 된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 왜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이 이토록 만연한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구체적 정책이 필요할 뿐이다.”(p26)라고 말하며, 기존의 인식을 뒤집는다. ​정확한 분석이다. 피해자 정체성이 굳어지면, 말할 수 있는 피해자와 말할 수 없는 피해자가 나눠진다. 젊고 무기력하며 순진한 피해자 이미지는 피해자의 위치를 고정시킨다. 그렇게 되면 이미지 밖에 존재하는 피해자가 처한 상황적, 당파적 맥락을 헤아릴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어떤 ‘미투’는 증거가 있어도 ‘위드 유’가 되지 못한다. 성폭력 피해자가 학교폭력 가해자라면 그녀와 연대할 수 있는가. 10년 넘게 배우자로부터 매질당한 ‘아내 폭력’ 피해자는 남편을 ‘공적’으로 고발할 수 있는가. 성판매 여성은 성 구매 남성의 손에 죽기 직전까지 구타당해도 왜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못 하는가. 여성 노숙인이 남성 노숙인에게 강간당한 사건은 왜 뉴스에 보도되지 않는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실천법을 행하려면, 피해자를 무조건 옹호할 것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울려퍼지지 못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발굴해야 한다. 음지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 : “내 몸이 곧 나다. 그러나 내 몸은 내가 아니다.”​현재 ‘성적 자기결정권’은 여성들 가운데 ‘비장애 성인 여성’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어 장애 여성, 어린이, 노인, 환자, 성 소수자에게는 적용하기 힘들다. 게다가 성적 자기 결정권이 강조하는 ‘동의 여부’는 젠더 권력을 지우고 성범죄를 ‘의사소통 문제’로 세탁하여, 피해자가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이중고를 부과한다. 몇 가지 예시만 살펴봐도 성적 자기 결정권의 허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레즈비언 가출 청소년이 생계비를 벌기 위해 원조교제를 한 것은 의지에 따른 것인가. 성 봉사자 남성이 피임을 하지 않아서 지적 장애 여성이 임신을 했다면 이 성관계는 합의인가 폭력인가.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채팅으로 만난 성인 남성의 꾀임에 넘어가 하룻밤을 보냈다면 그루밍 성범죄인가, 연애의 연장선인가. (현행법상 성인이 만 16세 미만 청소년과 성관계를 맺을 시, 이유불문 처벌 대상이긴 하나 여전히 ‘동의 여부’는 중요한 쟁점이다.)​저자는 획일화 된 인권의 맹점을 적확히 파고든다. ‘강제 vs 동의’라는 대립적 논쟁 구도를 거부하고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에 입각하여 성적 자기 결정권 개념을 재정의한다. 더 나아가 ‘탈식민주의’에 입각한 여성 몸의 공간화 개념을 발명하여 ‘몸/정신’ 이분법이 몸과 정신의 상호 작용을 무시해왔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그리고 여성의 몸이 남성에 의해서든(순결 이데올로기) 여성 자신에 의해서든(성적 자기 결정권) 주체의 대상으로서 공간이 되면, 몸은 언제나 이성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자위용품 것이 된다. 이러한 논리에서 여전히 몸은 이성, 의식 중심주의에 종속되고 몸들은 여성 개인들의 저항은 의미화되기 어렵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넘어, 몸을 식민화하지 않는 성폭력에 대한 새로운 저항 개념 모색이 필요하다(p268~269)라고 제안한다. 근대적 사고관을 탈피하여 몸과 정신은 하나의 유기체라는 관점에서 성폭력에 저항하는 개념을 만든다면, 성적 자기 결정권을 넘어서는 구호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먼저 이론적으로 훑어보자. 자유주의가 개인의 선택과 의지를 중시한다면, 구조주의는 인간과 사회가 개인의 의지나 선택, 책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라고 해석한다. 가부장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대표적인 구조들이고, 이에 저항하는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라는 구조가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는 문제의 원인이 계급, 젠더 등 주요 모순에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개인이 구조에 대응하는 제각각의 행위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개인 vs 구조’의 대립은 논의를 제자리걸음에 머물게 한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구조의 문제점과 개인의 의지를 동시에 다루면서, 구조에 대한 개인의 반응과 대처 방식은 다를 수 있고, 이 다름이 변혁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과 구조를 교차하는 논리는 구조적 억압을 드러내면서도, 개개의 주체성을 놓치지 않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갑’과 ‘을’, ‘가해’와 ‘피해’ 관계는 가변적이다. 상황에 따라 오늘은 ‘갑’이었다가 내일은 ‘을’이 될 수 있고, 오늘은 ‘가해자’였지만 내일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상황적 맥락과 지식이 있어야 폭력의 양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흔히 성적 자기 결정권을 요구하는 많은 이들이 “내 몸의 주인은 나다”,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외친다. 몇 해 전, 낙태죄 폐지 운동의 대표 슬로건도 “My Body My Choice”였다. 대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이 구호들은 자기 몸을 식민지로 삼는 모순에 빠뜨린다. 여성의 몸이 공간화 되면 ‘여성’이란 주체는 사라지고, 남성들 간의 전쟁터로 뒤바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윤금이 사건’이 ‘여성 문제’가 아닌 ‘제국주의 vs 민족’ 문제로 물타기 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남성들 간의 힘 겨루기가 여성의 몸을 매개로 실현된 것이다. 남성 문화에 의해 자기 몸이 영토화되는 것에 반기를 든 여성들은 몸의 주권을 되찾고자 거리로 나섰다. “내 자궁에서 손 떼”라고 목소리 높이고, “찍지마, 보지마, 유포하지마”라고 소리치며 불법 촬영물 규탄 시위를 이어갔다. 유의미한 투쟁이었지만 완전한 몸의 해방을 맞이하려면, “내 몸이 곧 나다. 그러나 내 몸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블랙 웨이브의 슬로건이라고 해도 무방한 이 구호는 크게 두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내 몸이 나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몸을 타자화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수많은 타인을 거쳐 온 ‘나’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몸은 열등하고 정신은 월등하다는 위계질서는 남성 중심 사회가 정한 기준이지 사실이 아니다. 몸이 있어야 사물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 몸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읽고 쓰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내 몸은 내가 아니다”라고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내 몸은 젠더, 지역, 관심사, 친밀한 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었다. 단 하나라도 어긋났다면 내 모습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남들과 다른 몸, 고유한 서사와 맥락을 가진 몸을 ‘나’ 자신으로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성적 자기 결정권을 사수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손가락질 받는 몸들이 서로의 용기에 힘입어 광장에서 내 몸이 곧 나라고 외칠 때, 내 몸은 내가 아닌 것이 되어 더 많은 타인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틈새 파고들기​페미니즘 혁명은 가능할까. 안팎으로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제 ‘진보’라는 워딩마저 진부하게 들린다. 젠더 인식이 부재한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은 ‘남녀 갈등’을 유발하는 사회악으로 여겨진다. 전국학부모단체연합은 ‘전교조가 지향하는 급진적 성교육과 페미니즘 사상교육을 반대한다’라는 성명서를 제출했고, 학교 앞에서 페미니즘 반대 시위를 벌였다. 대학 내부 사정도 피차일반이다. 2018년에 저자를 포함한 여성주의 강사 두 명이 모 대학 총학생회로부터 인권 강의를 요청받았다. 그런데 무려 200 명 넘는 재학생들이 한 강사의 강연을 취소하라고 압박하면서 총학생회를 탄핵하자는 서명 운동을 주도했다. 이외에 훨씬 많은 익명의 학생들이 강사의 신상을 털고 입에 담지도 못할 혐오 발언을 배설했다. 결국 총학생회는 심리적, 물리적 압력을 견디지 못해 취소 요청을 받아들였다. (불행 중 다행히도 학내 페미니즘 모임이 맞시위를 열어 강연 취소에 항의했다고 한다.)​여성학계와 단체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여성학 연구자들은 인터뷰이 찾기가 사막에서 바늘찾기 보다 어렵다며 답답함을 토로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여대’가 아닌 이상 대학교 내에서 페미니스트로 낙인 찍히면 캠퍼스 자위용품 라이프가 끝장날 수 있기 때문에 함부로 ‘페밍아웃’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 여성 인권 관련 예산들이 줄줄이 삭감되면서 전국의 시민단체와 민간단체들은 재정난에 허덕이다가 사업을 접었다. 실체 없는 혐오가 힘을 얻고, 조작된 내용이 사실을 폐기하고, 소수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성 차별 있음’의 증거를 제시해도 믿지 않는 사회. 이게 미소지니가 아니면 무엇이 미소지니인가. ​폭군이 민생을 초토화시키고, 혹세의 무리들이 활개치는 시대에 맞서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구조를 바꾸는 것이지만, 나 같은 소시민은 그 존재가 미생물 수준이라서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어차피 망했다며 자조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다. 우리는 제도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구조를 낙후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틈새 파고들기’를 채택했다. 신자유주의의 위세를 꺾을 방도는 없지만, 적어도 ‘승자독식’, ‘독자생존’ 만큼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그리하여 개개의 취약함이 공존을 위한 발판이 될 수 있도록, 감정 노동과 돌봄 노동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망을 구축해야 한다. ​독일의 여성 전용 쉼터 ‘Frauenhaus(여성의 집)’은 돌봄을 또 하나의 질서로 제시한 좋은 선례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여성이 노숙인이 되는 제일 큰 원인은 가정폭력이다. 살기 위해 맨몸으로 뛰쳐나온 여성들은 갈 곳이 없다. 독일은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등 위험에 처한 여성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무료로 지낼 수 있는 ‘여성의 집’ 총 353개와 약 40개의 임시 주거시설이 있다. 이곳에는 현찰, 옷, 방, 화장품, 악세사리 없는 게 없다. 독일 이주민 여성이어도 똑같은 혜택이 주어진다. 독일어를 하지 못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발생하면 통역사가 직접 방문해서 일일이 어려운 점을 전달해준다. 사회복지사들은 자립에 필요한 각종 기관을 소개시켜주고 맞춤형 교육을 알아봐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발로 뛴다. 표면적인 문제 해결을 넘어서 여성들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미래를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렇게 매년 약 15,000~17,000여명의 유자녀 여성과 약 30,000~34,000명의 여성이 ‘여성의 집’을 거쳐 자립했다. (1)​한국은 어떤가. 여성 노숙인들은 남성들이 북적거리는 쉼터를 피해 공원 화장실에서 쪽잠을 자고 24시 패스트푸드점을 전전하며 밤을 지세운다. 무료 급식소에 배식판을 들고 서 있으면 남성 노숙인들이 날선 눈빛으로 쏘아보고 새치기를 한다. 구석에 자리잡고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으면 대뜸 “꼴린다”라는 성희롱이 날아든다. 지하철 구석진 자리에서 새우잠이라도 청하면 낯선 손길이 몸을 더듬어댄다. 월세를 마련하여 쪽방촌에 들어가도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 여름에는 남자들이 옷을 깨벗고 다니는 통에 더워도 문을 열고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 전용 고시원을 알아 봐도 입주할 수가 없다. 여성이라고 다 같은 여성이 아니다. ‘여대생’과 ‘여성 직장인’은 여성 노숙인을 환대하지 않는다. 일하고 공부하는 여성과 노숙인의 계급은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2) ‘의지’는 의식주가 갖춰졌을 때 발휘될 수 있고, ‘노력’은 미래가 보일 때 실천할 수 있으며, ‘독립’은 탄탄한 연대와 지원을 바탕으로 이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 노숙인이 자립하려면 정부의 예산 지원과 여성 노숙인 전용 쉼터 확대가 절실하다. ​마지막으로 시민 사회가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응답하는 방식에 대해 논하고 싶다. 가해자가 특정되자마자 신상을 털고, ‘관상은 과학’이라는 말로 인신 공격을 가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사이버 불링’이다. 생김새, 학벌, 지역, 경제력을 약점 삼아 조롱하는 것은 가해자의 스테레오 타입을 형성하여 ‘굴절 혐오’로 변질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망한 사회를 이보다 더 엉망진창으로 만들 순 없다. 당신이 정의의 수호자가 되고 싶다면 오직 가해자가 저지른 ‘죄’에 대해서만 비판해야 하고,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 냉철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그리고 피해자에게는 정형화 된 이미지(순결하고 얌전한 태도)를 덧씌우지 말아야 하며, 피해자의 위치에 따른 개별적 차이를 고려하여 상황적 지식과 맥락에 따른 도움이 무엇일지 골몰해야 한다.​꽤나 오만한 태도로 방법론을 제시했지만 누군가 “너는 잘 실천하고 있니?”라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그래도 늘 내 위치에서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할 자신은 있다. 비록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이긴 하나, 살아 숨쉬는 한 체제와 개인 사이의 틈새에서 길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끝끝내 사랑을 지켜낼 것이다. 두렵다고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연대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연대하기를 꿈꿀 것이다. 감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사랑을 잃지 않길 바라며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나눈 첫 번째 이야기를 마친다. ​​​(1) 2019년 신문 독일, 폭력 피해 여성 위한 '여성의 집'전문 상담센터 지원 확대&quot기사 일부 발췌(2) 참고도서 : : 당신이 모르는 도시의 자위용품 미궁에 대한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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