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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를 실제로 살아본 분들의 증언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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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ili 작성일24-09-25 14:03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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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구려$ 무명도공無名陶工기념비에 붙여 기장은 유서 깊은 문화의 고장이다. 부산지역에 동래와 기장 두 곳에 향교가 남아 있는데, 기장향교는 이미 광해군 때에 만든 중등 교육의 장으로서 그 시대 이후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미루어 그러하다. 그래서 그런지 곳곳에 문화적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흔히 기장하면 멸치 미역을 자랑하지만, 이러한 소중한 물산 외에도 이 향교가 있음을 소중하게 이야기 하는 것은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나는 ‘자족성을 갖춘 전원형 생태도시’ 라는 모토로 건설한 기장 정관 신도시에 내 마지막 삶터라는 희망을 걸고 4년 전 입주초기에 이사를 왔다. 그때는 한 동의 건물에 두서너 집이 입주를 했던 때라 부산고구려$ 이 한적한 도시에 밤새도록 환하게 밝힌 가로등을 늘 보면서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무너진 성터구나/분양 못한 신도시//삶처럼 얽힌 잡초/주인 모두 어디 갔나.//스산한 들녘 끝으로/밀려오는 쓸쓸함(신도시·1) 휑하니 빈창으로/유령처럼 달리는 버스//신도시 밝은 불빛/대낮처럼 휘황해도//사람들 모여들지 않아/ 폐허처럼 내던진 곳.(신도시·2). 박아 논 둥근 지주/성채처럼 울울한데//파다만 지하실은/천 평 넘는 연못이네//밤 되면 개구리 무리 주인 없어 슬피 울데.(신도시·3) 낮게 깔린 안개구름/화광처럼 환하네.//이백만 평 넓은 도시/곳곳에 세운 가등街燈//사람들 모이지 않는 땅 부끄러워 타는구나.(신도시· 4) 삼백 밀리 쏟은 비에 넘쳐버린 좌광천/ 걷던 길도 놀던 언덕도//황토 물로 도도 하네/비 개자 물에 잠긴 부산고구려$ 꽃잎/ 방긋 웃고 섰구나.(신도시·5) 그야말로 을씨년스런 신도시의 처음 모습이었다. 그러나 매암산에 아침 햇살이 비치면 우람한 매암바위와 짙은 숲의 경관이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아침이 좋은 기장”이라는 표어가 적절하다고 감탄을 했다. 그동안 달음산을 비롯한 주변 산을 오르기도 하고 여기저기 바닷가 긴 해안선을 걷기도 했다. 그리고 산재한 옛 유적을 찾을 기회도 있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앞으로 시간을 내어 계속할 작정이다. 올 봄 들어 임진왜란 이후 끌려간 무명(無名)사기장들을 추모하며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 추모시를 청탁하는 추모회 담당 사무국장의 전화를 받고서야 알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군하던 왜병들이 이 부산고구려$ 빠진 사그릇이 개밥그릇으로 쓰이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혀 배낭에 소중히 넣어가고, 담장에 끼워둔 사금파리 파편들도 수습해 갔다거나, 사백 명이 넘는 도공을 붙잡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우리 도공에 대한 나의 지식이었다. 그리고 도공 심수관이나 이삼평의 이야기는 먼 귀로 듣는 정도였다. 그런데 기장에서도 팔산(八山)을 비롯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도공들이 잡혀갔다는 것이며, 그분들을 추모하는 비가 10년 전에 세워지고 올해가 그 10주년이 된다는 것은 최근에야 알았다. 고산 윤선도 선생이 6년 동안이나 귀양살이를 하면서 이름 지었다는 유서 깊은 황학대가 아래쪽 바닷가에 내려다보이고, 서답골 바로 건너편의 ‘기장왜성’과 ‘국수당’ 소나무가 보이는 부산고구려$ 곳에 위치한 ‘무명도공기념비’를 찾아간 것은 비가 촉촉이 내리는 이른 봄이었다. ‘무명도공기념비’가 도공들이 끌려갔을 법한 바닷가와 바로 코앞에 버티고 있는 왜성이 바라보이는 곳에 세워진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두 번 째는 소름(小廩) 손중환(孫中煥) 선생과 통화가 되어 방문하게 되었다. 긴 시간 기념비의 유래와 자신의 수준 높은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특히 고구려 벽화의 문양과 색채를 접시에 재구해 내는 어려운 작업에 혼신의 정력을 쏟고 있었는데, 차를 내어놓고 나누는 대화 속에 우리 것에 대한 진한 애정과 굳은 신념을 볼 수 있어서 감명을 받았다. 잡혀간 우리 도공들이 부산고구려$ 고국을 그리며 흙에 혼신의 정신을 불어 넣었을 것을 생각하니, 오늘 일본이 세계적인 도자기 국가가 된 그 밑바탕을 생각하니 만감이 스친다. 나는 몇 줄 시로 내 추도시의 초안을 잡아보았다. 손끝을 타고 전해오는/부드러운 감촉/따스한 손을 매만져/혼을 불어 넣고/생명을 불어 넣는다./화해의 불꽃이 일어/흙은 순순히 /사랑의 막사발로 태어났다.//어머니 젖무덤처럼/한없이 부드러운/흙의 본성/물과 만나 생명의 자식들을 낳고 /억겁을 넘나드는 /조선혼의 증인이 되었다. //짓이겨져/사금파리로 남더라도/한 점 소리치지 않는다./영원히 이 땅에 /생명의 흔적을 남기는 /도공의 혼을 어찌 /두려워하지 않으랴. //조선의 아름다운 태깔에 /눈 뒤집혀/막사발 챙겨 넣는다./사백 도공 기어이 붙들어간 /그 야만은 밉지만,//오늘 그런 부산고구려$ 기개로/우리의 새 역사를/가다듬어야 하리! //창망한 동해 너머/조국을 그리다가/낯선 곳 이국 땅 /묻혀 있는 혼백들이여/사랑하는 우리의 /자랑스런 선조들이시여 //이 조국의 흙을 잊지 마시라/여기 가신님들 그리는 /후예들의 혼과 혼에 /거룩한 얼이 살아 있음이니/기어이 세우리라 /우리의 새 역사를!(기어이 세우리라 전문) 2013. 5.24. 정경수 삼가 올리다.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을 ‘도자기전쟁’이라고 명명할 만큼 도자기에 대한 집념이 대단했고, 이삼평 같은 경우는 도조(陶祖)라고 하고 신격화할 정도이니 그들이 얼마나 조선도자기에 매료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 선조 도공들에 의해 세워진 일본 도자기의 발전이 우연이 아님을 이로써 알겠다. 잡혀간 도공들의 고생이 처음에는 심했겠지만 도공들에 대한 부산고구려$ 좋은 대우가 결국 일본 도자기 발전의 시금석이 되었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3년 전 기장 장안읍의 일대에 기장 도예촌 조성의 삽을 들었다. 2018년이면 30만평 가까운 광대한 지역에 도예의 산실이 생기는 것이다. 우리 기장엔 도예가들이 많으며 이웃 남창지역 등에도 우수한 도공들이 많은 줄 안다. 도공들은 찰흙처럼 똘똘 뭉쳐 멋진 막사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틈이 있을 수 없다. 아침이 좋은 기장이 문화와 예술의 혼이 되살아나는 산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오늘따라 매암산의 기운이 더욱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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